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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8 대한민국은 공동의 가치가 없는 사회

대한민국은 공동의 가치가 없는 사회

경향신문 기획보도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
김상봉(전남대 철학)-박명림(연세대 정치학) 서신대화를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논의합니다.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아 퍼옵니다.


<2편> 박명림교수가 김상봉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  "대한민국은 공동의 가치가 없는 사회"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이제 여독이 좀 풀리셨나요? 새해의 시작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우리들 개인과 주변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일들이 하나도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한국현실을 고민하는 정치학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속한 시민으로서 무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엔 오늘의 한국사회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민주화 이후 20년,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진행되던 변화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더욱 급격하여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공론, 공익, 공준, 공공성, 공동가치나 정신이라고 할 어떤 합의나 합의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공동 가치 없는 공화국’ ‘공준 없는 공동체’, 이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가치와 행동의 탈공공화야말로 오늘의 상황을 근거짓는 핵심인 동시에 한국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실의 혼돈과 미래의 불안의 근원 역시 따지고 보면 모두 공준 창출의 실패에서 출발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합의 가능한 공준과 공공성을 찾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물론 갈등의 건강성 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거쳐야겠지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은 그래도 ‘경제발전’ ‘민주화’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나름대로 합의된 가치와 준칙이 존재하여 암묵적인 공준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국가주의에 의한 강제로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합의된 지향가치로서의 공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넓은 합의는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회적 비전을 의미했지요. 진보와 보수, 좌우가 공히 인정하는 공정한 발언으로부터 파생하는 귄위와 영향력을 갖는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경제인도 존재했고요.

그러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가치도 인물도 그룹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언론과 지식과 종교의 역할붕괴처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공적 가치 창출과 대화의 중심이어야 할 정치에 공준이 존재하나요? 공공성과 공론의 전달자여야 할 언론에 최소한의 싹이라도 있나요? 공준, 공공성이 존재하질 않자 이를 대체하는 다른 흐름들이 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 사사화(私事化), 역(逆)근대화, 근본화, 파당화의 네 가지가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사사화를 볼까요? 사회의 최소 공공 준거에 대한 합의가 부재하자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사적 관점과 이익의 전면화와 극대화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시장과 기업의 논리가 전체 국가와 사회를 장악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시장과 기업의 창의성, 경쟁성, 효율성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경제는 인간들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한 근본요소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적 기업논리가 인간생활, 국가, 사회의 다른 모든 공적 영역까지 지배해나갈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마저 사익 대변자로 전락하며 공공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적 기구들이 공공성을 상실하면서 개인들이 생존과 생활을 위해 직접 시장과 대면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사회화, 형평화, 복지화를 통해 국가·사회의 공공성, 민주성, 휴머니즘을 동시에 제고하였던 역사적 보편경로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지배적 담론과는 정반대로, 사사성이 아닌 공공성의 제고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 공공성의 한 징표인 한국의 현재 공적 사회지출은 30년 전 민주국가들이 도달했던 수준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시민성과 공공성의 표상이어야 할 국가와 정부가 ‘사적 시장정부’ ‘유사 민간기업’이 되어있고 대통령은
‘CEO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아니 정부와 대통령 자신이 그런 방향으로 가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민친화 또는 민주주의 친화나 민주공화국 친화가 아니라 공공연히 기업친화, 시장친화를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세계의 민주주의 역사에 비추어 본말 전도도 이런 전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저는 당시 유행하던 CEO 대통령 담론을 두고 오토 아펠이나 하버마스의 개념을 빌려 전형적인 ‘수행모순’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나 개념이 형성되는 순간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명제나 조건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사익·시장·경쟁을 대표하는 CEO로서 성공하면 할수록 공익·균형·조정을 표상하는 대통령으로선 실패할 수밖에 없고,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려고 하면할수록 CEO성격을 버려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CEO 대통령’은 어느 하나를 빨리 버리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공동체를 파국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국가와 정부에 공익, 공공성이란 양도할 수 없는 최소 존재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듯 공화국이란 나라가 공공적 기관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사화의 진행과 함께 두드러진 현상은 바로 역근대화입니다. 우리는 근대성의 표상으로서의 제도적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지 두 세대 만에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화화를 포함하는 근대화란 무엇입니까?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 가치, 공적 지향에의 합의를 통한 사적 신분, 출신, 세습, 주인-노예나 귀족-평민 같은 양극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나요?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는 재산의 불평등·양극화가 교육·기회·취업·수입·신분의 극심한 불평등으로 연결되고 두렵게도 공공성·공화성의 표상인 공직·대표구성까지 좌우하고 있습니다. 중간과 중심의 강화를 통해 신분과 재산과 기회의 양극성을 넘어 통합을 지향한 것이 근대화요, 공화화요, 민주화였다면 제가 아는 역사지식으로는 요즘 우리 사회처럼 거꾸로 가는 근대화와 공화화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사사화를 통한 세습사회를 공화국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문제는 이런 양극사회가 통합과 안정 속에 지속된 사례가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부족한 대로 비교적 일찍 시민적 공화주의나 사회적 연대, 공공성, 사회화를 주창한 것은 무슨 평등주의나 급진주의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화를 통해 이 사회의 해체를 막아보자는 소박한 시민윤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양극사회로 진입했고 더욱 절망적인 것인 부모의 경제, 사회적 양극지위와 자녀의 꿈, 교육, 기회, 수입의 양극성이 거의 비례하여 전승되는 근대이전 사회로 역진입하였음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 역동성의 다른 표현은 삶의 높은 불안정성인데 저는 이것이 바로 엄청난 탈공공성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공준의 부재는 또한 문제판단과 갈등의 근본화·근본주의화와 적나화(赤裸化)로 직접 연결되고 있습니다. 공론이나 공적 합의가 존재한다면 사회갈등들은 대부분 그것의 성취를 둘러싼 절차나 방법, 자원배분에 관한 적정 갈등 또는 최소 갈등에 머무르지만 한국사회의 갈등은 언제나 근본적 이념과 가치를 둘러싼 최대갈등, 또는 감정대립으로 치닫곤 합니다. 사회·정치적 언어 역시 ‘친북좌파’, ‘수구꼴통’, ‘척결’처럼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지요. 즉 한국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근본화로서 인간 생활의 가장 나중 또는 근본인 개인적 실존 차원의 범주들이 사회적, 정치적 판단과 행동의 기준·준칙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입니다. 공준이 존재하고 국가의 공공성과 중간 집단의 바른 역할이 있었다면 나타나기 힘든 현상입니다.

늘 근본주의로 돌아가니 가치의 교환을 통한 공존 체계인 정치마저도 이들 근본화의 영향을 받아 좀체 타협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근본화는 예컨대 종교화, 이념화, 지역화를 말합니다. 모두가 근대화, 민주화, 공화화의 진전과 함께 사회갈등의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던 요인들이 점점 더 중요한 정치행위와 갈등요인으로 불러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공공적, 민주적, 사회적 의제들은 묻히게 되고 말지요.

끝으로는 파당화를 들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사회문제의 수렴을 통한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정당, 언론, 종교, 대학, 조합, 경제·사회단체와 같은 중간기제들에서 더욱 격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와 타자, 적과 동지, 흑과 백, 선과 악, 진보와 보수를 가른 뒤 모두 자기가 속한 쪽의 논리와 이익만을 부르짖을 뿐입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이익과 그것을 정당화해줄 파당적 이익과 이념을 전제로 판단하고, 또 거의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그것을 위해 발언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속한 진영을 대변하고 자기진영에게 확인받기 위한 파당적 내지르기는 존재하나 상대 진영과의 대화를 향한 발언은 존재하질 않습니다. 공적 말의 신뢰가 붕괴되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옳은 말도 상대진영의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기안녕과 이익은 상대의 그것을 인정할 때 확보된다는, 즉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기본 철칙조차 망각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관계와 만남은 완전히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외려 한 공동체 내의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진영은 공존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대화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대화란 서로 다른 생각과 이익 사이의 인정, 존중, 교환이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에게 본래적 의미의 대화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사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시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갈라져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갈라놓았고 이것을 무엇으로, 어떤 가치와 이념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공적 관계와 공준의 부재, 사사화, 파당화는 근대적 계약관념조차 소멸하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급기야 예종적·굴종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탈공공화의 궁극적 귀결로서의 비인간화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점, 즉 ‘공적 시민’과 ‘인간적 사회’의 회복이야말로 공화국을 다시 세우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이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최소 생존을 위해 온갖 사적 이해관계에 자신의 권리와 존엄을 내어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근대적 주체로서 체결한 계약관계는 사라지고 전근대적 주인-노예관계가 재등장하게 되지요.

예컨대 수많은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정규직과의 경제적 수입의 차이를 넘어 최소한의 삶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파괴된 상태로 내몰려 삶의 순간순간 인간적 차별과 모멸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참아야 하는 굴종은 그들을 목적적 존재가 아닌 지위로 매일매일 내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회체제가 일단 최소 공공성과 계약관계라도 유지하여 품위와 격조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안정과 자존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것은 정말 공화국의 한 시민으로서 저의 최소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시민적 공공성에 기초한 새로운 공화국을 향한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소 생존과 자존의 제공의무는 국가와 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공적 역할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또 사회 중간집단들의 공공성 회복은 가능하며 시민주체성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공준 창출과 확대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선생님과 함께 이 물음들을 되새기며 오늘의 편지를 맺습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

출처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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